自由という地獄を生き抜くことができる人はそう多くない★자유라는 지옥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坂口安吾の『家康』にこんなクダリがある。

「本当に自由を許されてみると、自由ほどもてあつかひにヤッカイなものはなくなる。芸術は自由の花園であるが、本当にこの自由を享受し存分に腕をふるひ得る者は稀な天才ばかり、秀才だの半分天才などといふものはもう無限の自由の怖しさに堪へかねて一定の標準のやうなもので束縛される安逸を欲するやうになるのである。」

僕もそう思う。自由という地獄を徹底的に生き抜くことができる人はそう多くない。

사카구치 안고의 『이에야스』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진정한 자유가 허락되고나면 자유보다 다루기 어려운 게 없다. 예술은 자유의 화원이나 정말 이 자유를 향수하고 마음 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귀한 천재 뿐이다. 수재나 반 천재도 그 무한한 자유의 무서움을 견디지 못하고 일정한 표준같은 것에 속박되는 안일함을 원하게 되는 법이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자유라는 지옥을 철저하게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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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의 구조 전환 – 붕괴하는 ‘사회의 전체상’과 데이터베이스

문예지 『오늘의 문예비평』88호(2013년 봄호)에 기고했던 글을 공개한다. 「익명성의 구조 전환」이라는 글로 인터넷 등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정보환경 속에서 살게 되면서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 중 하나인 ‘익명성’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익명성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해 쓴 글이다.

익명성의 구조 전환 – 붕괴하는 ‘사회의 전체상’과 데이터베이스

도쿄대학 박사과정  안 천

인터넷을 비롯한 새로운 정보 환경이 일상 생활 속에 깊숙히 스며들면서 우리가 사회를 경험하는 방식도 바뀌고 있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정보 환경이 인간의 사회 인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익명성을 화두로 살펴보려 한다. 이 문제를 사고하는데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따라서, 후반부에서는 아즈마의 논의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필자는 개인의 자유와 쌍방향적인 소통 매체가 결합되면서 인터넷 상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인간 관계, 의사소통 기법, 연대의 방식에 큰 관심과 희망을 가짐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상실되어가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했던 필자는 약 8년 전에 아즈마의 「정보자유론(情報自由論)」에 접하고 크게 매료되었다. 개인적으로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상실되어가는 그 무엇”을 매우 적확하게 언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 때 생겼던 관심으로 『일반의지2.0』의 옮긴이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즈마는 새로운 정보 환경으로 인해 민주주의 자체의 재구성이 필요해졌다며 『일반의지2.0』에서 ‘민주주의2.0’을 주창하고 나선다. 어쩌면 그가 내놓은 결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결론에 반대하더도 그의 문제제기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글은 그의 결론이 아니라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정보 환경이 ‘사회의 자기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도록 한다. 먼저 ‘익명성’부터 시작해 보자.

1. 무엇이 익명을 가져왔는가? Read the rest of this ent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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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역책의 옮긴이 후기가 전혀 다른 이유

『이 치열한 무력을』이 2쇄를 찍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적어본다.

지금까지 내가 번역한 책은 두권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2.0』과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 그런데, 두권의 옮긴이 후기는 전혀 다른 내용이고 그 스타일도 대극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 두 책이 내게 다가온 방식과 내게 있어 그 의미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아즈마의 책은 내가 담당했던 웹진 연재 지면을 통해 스스로 한국어 독자에게 소개한 책이다. 번역 의뢰도 그 소개글을 읽은 출판사 담당자를 통해 들어왔다. 이 책의 번역 의뢰가 들어왔을 때 내 안의 어떤 내적 필연의 연장선상에 이 번역 작업이 있음을 직감했다. 따라서 옮긴이 후기에서 굳이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가 접했으면 하는 배경 지식을 전달하는, 설명적인 글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후기를 대신해 그런 종류의 글을 썼다.

한편, 사사키 책의 번역 의뢰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내게 있어서 그의 책을 번역할 내적 필연성은 없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도래해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낯선 손님과 같았다. 과연 문을 열고 이 손님과 말을 섞어도 되는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사사키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어떤 과잉/결여를 느꼈던 과거가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번역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 (시간적인 순서상) 첫번째 이유는 후기에도 쓴 것처럼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후루이 요시키치의 말을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처음에 번역을 결심했을 때 사사키는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아즈마의 책은 내적인 필연성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사사키의 책은 우연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사키의 책에 대한 옮긴이 후기는 아즈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우연을 다루는 글쓰기 방식, 즉 이야기(에피소드)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두 책의 옮긴이 후기 스타일이 전혀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은 필연성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우연이 사람을 크게 움직이게끔 한다. 논리와 서사가 다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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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萌え」も犯罪!?

韓国では昨年、「リツイートが有罪になる事件」が起きた。ツイッターで北朝鮮が運営するアカウントのつぶやきをリツイートしたのが国家保安法違反にあたると検察に起訴され、昨年の11月韓国の地方裁判所で有罪判決を受けたのである。この事件について昨日(2013年8月22日)高等裁判所で全面無罪の判決がくだった。この有罪判決は異常であると訴えてきた身としては嬉しい結果である。

とはいえ、検察が今回の高裁判決に不服し、最高裁まで持ち込まれるかもしれない。この問題について以前『genron.etc #7』(第9回目の連載。2013年3月発行)で取り上げたことがある。今回の高裁判決を機に、当時の寄稿文をここに公開する。

「萌え」も犯罪!?

 安天

1.リツイートも犯罪になる

昨年(2012年)の11月21日、韓国ではツイッターをめぐって二つの法的判断がくだされた。まず、ツイッターは単なる私的なつぶやきではなく、公的な「表現物」であるという判断がなされた。そして、リツイートも犯罪になり得ることが確定した。ツイッターが公的な表現であるという判断は、状況によってはあり得ると思うので頷けるけれども、リツイートが犯罪に当たるという法的判断にはさすがに言葉を失った。世界で最も手っ取り早い犯罪が登場したことだけは確かだ。クリック一回で犯罪者になれる。

リツイートなどで有罪判決を受けたのは24歳のパク・ジョングン(@seouldecadence)。北朝鮮の当局が運営していると思われる「我が民族同士」(@uriminzok)のツイートをリツイートしたことが、韓国の国家保安法違反に当たるという判断がなされた。この「我が民族同士」という北朝鮮のアカウントがツイッター・デビューしたとき、韓国語を使用するツイッター利用者の間で結構話題になっていたことを今でもよく覚えている。

東日本大震災以前の2010年後半のころだった。あの北朝鮮もツイッターのアカウントを作り、つぶやきはじめたというので、興味本位で色々な人たちが「我が民族同士」のツイートに関心をもった。僕も例外ではない。北朝鮮もハングル文字を使うので、韓国語話者なら「我が民族同士」のツイートが読める。もっぱら体制の広報・宣伝のためのものだろう、というのは容易に想像できたが、それでも、どうしても直接自分の目で確認したくなるものだ。

想像してみてほしい。第2次世界大戦後、日本が二国に分断された。そのもう一つの国と戦争も経験し、未だに休戦状態だ。知り合いの家族や親戚の中には、向こうの国に住んでいる人もいる。その国は非常に閉鎖的で、中々国内の情報を公開しない。最近は、こちら側を砲撃したことさえある。そのような国が突如ツイッターのアカウントを作って、日本語でつぶやきはじめたとしよう。ツイッターをやっている人なら、そのアカウントに興味をもつのは自然といえよう。

2.国家保安法の存在

それと同時に、「我が民族同士」のツイートに関わることの厄介さも、ツイッター利用者の間には広く認知されていた。韓国では法的に思想の自由が制限されている。北朝鮮で作られた、あるいは北朝鮮を肯定する書物などを所持したり、北朝鮮に肯定的な態度を表明すれば、国家保安法違反になるのだ。 Read the rest of this ent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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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崎駿の「風立ちぬ」観る★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를 봤다.

이 감상은 일본어로 먼저 썼고, 한국어는 이를 번역한 것이다. 일어 뒤에 한국어  번역을 붙여놓는다.

歩む姿は美しい、しかしそれがその道の美しさを保障するものではない

二百人以上入れる劇場に約三十人程度が席に座っていた。大ヒットと言われる「風立ちぬ」がこの程度なら、他の映画の観客はもっと少ないはず。やはり韓国と比べて日本の映画館は空いている気がした。
羨ましい、と思った。日本では映画以外にも人々が楽しめる趣味が色々あって、映画館に人が集中す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だろうから。韓国で映画やドラマが存在感をあらわしているのは、おそらく人々の楽しむ文化的コンテンツに偏りがあるからだ。そのような背景があるため韓国映画やドラマはいいもの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が、その裏には趣味の多様性が根付いていない現状がある。幸い、最近の2、30代は趣味が多様化しつつあるようだ。

あの庵野秀明が主人公の声優だそうで、どんな声か想像しているうちに、映画館のライトが暗くなり、何編かの映画予告が流れる。そのあと、青い背景に白い線で描かれたトトロの絵が映り、ジブリ映画の始まりをつげる。そして、ヴァレリーの詩句がスクリーンに刻まれる。
「風立ちぬ、いざ生きめやも」
堀辰雄の訳、そのままだ。

……

哀しいけど美しいアニメだった。堀辰雄の『風立ちぬ』の感受性がそのままアニメになったような物悲しい美しさを漂わせている。この美しさは「アリエッティ」に似ている。しかし、「アリエッティ」より重苦しく、哀しい。主人公はひたすらどうしようもない現実を引き受けるしか無いからだ。アリエッティは学び、成長し、どう生きていくか選んでいく。しかし、「風立ちぬ」の主人公は最初からブレることのない確固とした夢を抱いている。
初めから二郎の前には一本道があり、一瞬も悩むことなく彼はその道を歩み続ける。飛行機設計士になって美しい飛行機をつくる。学びも、成長もすべてそのためのものである。その夢を実現するために一途に励む二郎の姿は尊い。しかし、どの道を選ぶべきか、あるいは自分の選んだ道は正しかったのか、悩み苦悩することはない。いや、描かれていない、だけかもしれないが。
その一本道を歩むためには戦闘機を作るしかない。それは避けられない宿命だ。どうしようもない現実だ。この物語のなかで歴史とは人間が選んで道筋を変えられるものではなく、自然のように人間の意志を超越した存在である。小林秀雄は歴史を宿命として捉えていたが、「風立ちぬ」において、まさにそのようなものとして歴史はある。二郎にとって夢がそうであるように。したがって、歴史の暗さがそのまま二郎の歩む一本道にのしかかる。彼は重苦しく、やりきれない気持ちを背負って歩んでいくしかないのだ。
その中での恋愛は、如何に大きな慰めと支えになるだろうか。テーマとして恋愛は見事な選択だと思われる。しかし、宮崎駿の描く恋愛は何かが欠けている。それが何かまではわからないが。ただ、二郎の夢が背負っている重苦しさと、二人の恋愛が呼び起こす哀しみが響きあって、物静かな美しい感覚として僕のなかの深い所で結晶した事実は疑いようがない。

さて、宮崎駿としては珍しく、アニメの背景となる世界が仮想の世界ではなく、現実の歴史上に実在した世界である。そのため、このアニメは人々の歴史意識の齟齬と同じくらい、てんでばらばらな反応を引き起こすだろう。例えば、貧しい日本が強大な西欧に追いつくため健気に全力を尽くそうとする場面がある。日本人の多くは、この場面に共感するはずだ。他方、韓国人にとって共感は難しい。自然と、「貧しい日本」の植民地とされた朝鮮を想起するだろうから。韓国で上映されれば、どのような議論になるか、凡そ予想がつく。そういう意味では、僕は観終えてしまったが、それでも楽しみが待っている。
どちらかと言うと、予想が外れる方に賭けたい。宮崎駿は思う存分、自分の描きたいものを描いた感がある(子供向けのアニメとは思えない)。したがって、この美しさを十全に感じることができないのは勿体無い。しかし、それを困難にする過去と現在があることから目をそらすのも良くないことだ。

二郎が道をトボトボと歩んでいく姿は健気で、純粋で、美しい。しかし、その美しさが、その道の向かう所、あるいはその道を取り囲んでいる環境の美しさまで保障するものではない。あまりにも当たり前なことだ。それをわかった上で、彼の悲しく美しい歩みに浸る。それでいいのではないか。

걸음걸이는 아름답다. 허나 그게 길의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백명 이상 들어가는 극장에 약 삼십명 정도 되는 관객이 앉아있었다. 대 히트 중이라는 「바람이 분다」가 이 정도라면 다른 영화 관객은 더 적겠지. 역시 한국과 비교해 일본 영화관은 자리가 많이 비는 것 같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는 영화 말고도 사람들이 즐기는 취미가 많이 있기 때문에 영화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일테니까. 한국에서 영화와 드라마가 큰 존재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마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 컨텐츠가 영화와 드라마 분야로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덕분에 한국에서 좋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높은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취미의 다양성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있다. 다행이 최근의 2, 30대층은 취미가 다양화하고 있는 것 같다.

「에반겔리온」을 만든 안노 히데아키가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성우를 맡았다. 그 목소리를 상상하고 있었더니 이윽고 영화관 불빛이 어두워지고 영화 예고가 몇편 흐른 뒤, 파란 배경에 흰 선으로 그려진 토토로가 등장해 지브리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발레리의 시구가 스크린에 새겨진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호리 다쓰오의 번역 그대로다. (이 시구와 「바람이 분다」라는 제목의 번역에 대해서 전에 쓴 글이 있다. 여기 참조 ⇒ 「바람이 분다-로 번역한 이유」)

……

슬프지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었다. 호리 다쓰오의 소설 『바람이 분다』의 감수성이 그대로 애니메이션이 된 것 같은, 애절한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은 「아리에티」와 닮았다. 하지만 「아리에티」보다 무겁고 슬프다. 주인공에게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에티는 배우고 성장해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 간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흔들림없는, 확고한 꿈을 품고 있다.

처음부터 지로(주인공 이름) 앞에는 길이 하나 놓여 있고, 한순간도 고민하는 일 없이 그 길을 계속 걷는다. “비행기 설계사가 되어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겠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는 지로의 모습은 존경스럽다. 하지만 어떤 길을 골라야 하는지, 혹은 자신이 고른 길은 옳은 길인지, 고민하고 고뇌하는 일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그려져 있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전투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역사란 인간이 선택해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처럼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역사를 숙명이라 했는데, 「바람이 분다」에서 역사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지로에게 있어 꿈이 그러한 것처럼. 따라서 역사의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지로가 걷는 길을 뒤덮는다. 그에게는 무겁디 무거운, 애달픈 기분을 짊어지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연애는 그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연애라는 테마는 절묘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연애에는 뭔가가 부족하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지로의 꿈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어둠과, 두 사람의 연애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이 공명하면서 잔잔한 아름다움이 내 깊은 곳에 생생한 감각으로 자리잡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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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의 배경 세계로 대부분 가상의 세계를 그려왔는데,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역사 의식과 같은 숫자의,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예를 들면 가난한 일본이 강대한 서구를 뒤쫓기 위해 소박하게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이 장면에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여기에 공감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자연스레 “가난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을 떠올리게 할테니까. 한국에서 상영되면 어떤 논의가 펼쳐질지 대체로 예상이 간다(우리에겐 “안봐도 비디오”라는 아름다운 고사성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다 봤지만 아직 재미가 남아 있다. 한국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질지 추측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논의를 기다리는 재미.

내 예상이 빗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맘 껏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것을 그린 것 같다(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전혀 아니다). 따라서 이 아름다움을 십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어렵게 하는 과거와 현재가 있다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지로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이 – 그 길이 향하는 곳, 또는 그 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아름다움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의 슬프고 아름다운 걸음걸이에 푹 빠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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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사태 앞에 마주 선 일본

2011년 8월에 계간지 『황해문화』72호에 후쿠시마 원전에 대한 글을 기고했었다. 나로써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관련된 다각적인 문제를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짧은 글 속에 포괄적으로 녹여내려 최선을 다 했다. 이 글을 쓴지 곧 2년이 된다. 당시 상황과 달라진 내용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후쿠시마 원전 소장으로 현장을 진두 지휘했었던 요시다(吉田) 소장이 얼마 전에 타계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전 사고 직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이 글도 생각이 났다. 여기에 요시다 소장에 대해서도 썼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의 몇달 동안, 참으로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 도쿄를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머무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는 길을 택했다. 이 글에는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아마 앞으로도 다시는 이런 종류의 글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개인에게 있어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글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개인적인 사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쓴 글이기도 하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단락에 있는 “우리가 행한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라는 말이다. 사고 전에도 막연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사고 후 많은 정보들을 수집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게 되면서 이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뿐만아니라, 때로는 얄팍한 지식이 오히려 무지보다 해가 되기도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앞에 마주 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 안 천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인 글이고자 한다. 왜 이렇게 큰 원전 사고가 났는지, 막을 방법은 없었는지, 일본의 대응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일본은 어디를 향해 가려고 하는지. 이를 확인해 가는 과정은 자연스레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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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立ちぬ」をどう翻訳する?★「바람이 분다」로 번역한 이유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가 어제(7월20일) 개봉했다. 보러가고 싶지만 인생이란 게 항상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나이를 먹을 수록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되는 것을 우선해야 하는 경향이 있는지라 오늘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에 내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보러가지 못하는 대신, 전에 트위터에 간략하게 썼던 이 애니메이션의 원제목 「風立ちぬ」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내 의견을 적어둔다. 결론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람이 분다」이다. 이번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호리 다쓰오堀辰雄의 소설 『風立ちぬ』에서 따온 게 아닐까 추측된다. 이 일본어 표현 자체가 호리 다쓰오의 이 소설 제목에서 유래한다.

“추측”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다른 유래가 있기란 사실상 힘들다. 왜냐하면 호리 다쓰오의 소설 제목 『風立ちぬ』는, 호리 자신의 번역에서 따온 표현이기 때문이다. 「風立ちぬ」라는 표현 자체가 호리 다쓰오라는 고유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호리는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의 시구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를 「風立ちぬ。いざ生きめやも。」라고 번역했다.

한국에 이 발레리의 시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번역됐다. 따라서, 「風立ちぬ바람이 분다」는 표현은 저절로 「いざ生きめやも살아야겠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이런 문학적 배경을 전제로 하야오는 「風立ちぬ」라는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번역 또한 “살아야겠다”라는 말을 상기시키는 번역어를 고르는 게 좋을 것이다. 아직 애니메이션을 보지는 못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 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호리 다쓰오의 존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으니, 제목의 「바람이 분다」 뒤에 이어지는 “살아야겠다”라는 메시지도 애니메이션 속에 담겨 있지 않을까?

현재 「風立ちぬ」는 한국 매스컴에 “바람 불다”, 혹은 “바람이 분다”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나보다. 나는 처음부터 「風立ちぬ」를 위와 같은 이유로 “바람이 분다”고 번역해 왔다. 한국에 개봉될 때 어떤 제목으로 번역될지 모르겠지만, 그 후로도 나는 “바람이 분다”로 밀고 나갈 것이다. “바람이 분다”라는 표현은 “살아야겠다”를 내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숨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폴 발레리의 저 시구가 한국에 어떻게 번역되어 왔는지를 감안한 번역을 해야 한다. 뜻이란 문맥에 좌우되는 것이고, 번역은 (만약 그게 가능한 상황이라면) 그 문맥을 최대한 올곧게 소환하는 길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고 거기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상상하다 보니, 이 애니메이션은 허무와 낭만이 뒤섞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추기 : 이로부터 4일 후에 극장에 가서 「바람이 분다」를 보고, 그 리뷰 「걸음걸이는 아름답다. 허나 그게 길의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를 블로그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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