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崎駿の「風立ちぬ」観る★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를 봤다.

이 감상은 일본어로 먼저 썼고, 한국어는 이를 번역한 것이다. 일어 뒤에 한국어  번역을 붙여놓는다.

歩む姿は美しい、しかしそれがその道の美しさを保障するものではない

二百人以上入れる劇場に約三十人程度が席に座っていた。大ヒットと言われる「風立ちぬ」がこの程度なら、他の映画の観客はもっと少ないはず。やはり韓国と比べて日本の映画館は空いている気がした。
羨ましい、と思った。日本では映画以外にも人々が楽しめる趣味が色々あって、映画館に人が集中す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だろうから。韓国で映画やドラマが存在感をあらわしているのは、おそらく人々の楽しむ文化的コンテンツに偏りがあるからだ。そのような背景があるため韓国映画やドラマはいいもの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が、その裏には趣味の多様性が根付いていない現状がある。幸い、最近の2、30代は趣味が多様化しつつあるようだ。

あの庵野秀明が主人公の声優だそうで、どんな声か想像しているうちに、映画館のライトが暗くなり、何編かの映画予告が流れる。そのあと、青い背景に白い線で描かれたトトロの絵が映り、ジブリ映画の始まりをつげる。そして、ヴァレリーの詩句がスクリーンに刻まれる。
「風立ちぬ、いざ生きめやも」
堀辰雄の訳、そのままだ。

……

哀しいけど美しいアニメだった。堀辰雄の『風立ちぬ』の感受性がそのままアニメになったような物悲しい美しさを漂わせている。この美しさは「アリエッティ」に似ている。しかし、「アリエッティ」より重苦しく、哀しい。主人公はひたすらどうしようもない現実を引き受けるしか無いからだ。アリエッティは学び、成長し、どう生きていくか選んでいく。しかし、「風立ちぬ」の主人公は最初からブレることのない確固とした夢を抱いている。
初めから二郎の前には一本道があり、一瞬も悩むことなく彼はその道を歩み続ける。飛行機設計士になって美しい飛行機をつくる。学びも、成長もすべてそのためのものである。その夢を実現するために一途に励む二郎の姿は尊い。しかし、どの道を選ぶべきか、あるいは自分の選んだ道は正しかったのか、悩み苦悩することはない。いや、描かれていない、だけかもしれないが。
その一本道を歩むためには戦闘機を作るしかない。それは避けられない宿命だ。どうしようもない現実だ。この物語のなかで歴史とは人間が選んで道筋を変えられるものではなく、自然のように人間の意志を超越した存在である。小林秀雄は歴史を宿命として捉えていたが、「風立ちぬ」において、まさにそのようなものとして歴史はある。二郎にとって夢がそうであるように。したがって、歴史の暗さがそのまま二郎の歩む一本道にのしかかる。彼は重苦しく、やりきれない気持ちを背負って歩んでいくしかないのだ。
その中での恋愛は、如何に大きな慰めと支えになるだろうか。テーマとして恋愛は見事な選択だと思われる。しかし、宮崎駿の描く恋愛は何かが欠けている。それが何かまではわからないが。ただ、二郎の夢が背負っている重苦しさと、二人の恋愛が呼び起こす哀しみが響きあって、物静かな美しい感覚として僕のなかの深い所で結晶した事実は疑いようがない。

さて、宮崎駿としては珍しく、アニメの背景となる世界が仮想の世界ではなく、現実の歴史上に実在した世界である。そのため、このアニメは人々の歴史意識の齟齬と同じくらい、てんでばらばらな反応を引き起こすだろう。例えば、貧しい日本が強大な西欧に追いつくため健気に全力を尽くそうとする場面がある。日本人の多くは、この場面に共感するはずだ。他方、韓国人にとって共感は難しい。自然と、「貧しい日本」の植民地とされた朝鮮を想起するだろうから。韓国で上映されれば、どのような議論になるか、凡そ予想がつく。そういう意味では、僕は観終えてしまったが、それでも楽しみが待っている。
どちらかと言うと、予想が外れる方に賭けたい。宮崎駿は思う存分、自分の描きたいものを描いた感がある(子供向けのアニメとは思えない)。したがって、この美しさを十全に感じることができないのは勿体無い。しかし、それを困難にする過去と現在があることから目をそらすのも良くないことだ。

二郎が道をトボトボと歩んでいく姿は健気で、純粋で、美しい。しかし、その美しさが、その道の向かう所、あるいはその道を取り囲んでいる環境の美しさまで保障するものではない。あまりにも当たり前なことだ。それをわかった上で、彼の悲しく美しい歩みに浸る。それでいいのではないか。

걸음걸이는 아름답다. 허나 그게 길의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백명 이상 들어가는 극장에 약 삼십명 정도 되는 관객이 앉아있었다. 대 히트 중이라는 「바람이 분다」가 이 정도라면 다른 영화 관객은 더 적겠지. 역시 한국과 비교해 일본 영화관은 자리가 많이 비는 것 같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는 영화 말고도 사람들이 즐기는 취미가 많이 있기 때문에 영화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일테니까. 한국에서 영화와 드라마가 큰 존재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마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 컨텐츠가 영화와 드라마 분야로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덕분에 한국에서 좋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높은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취미의 다양성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있다. 다행이 최근의 2, 30대층은 취미가 다양화하고 있는 것 같다.

「에반겔리온」을 만든 안노 히데아키가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성우를 맡았다. 그 목소리를 상상하고 있었더니 이윽고 영화관 불빛이 어두워지고 영화 예고가 몇편 흐른 뒤, 파란 배경에 흰 선으로 그려진 토토로가 등장해 지브리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발레리의 시구가 스크린에 새겨진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호리 다쓰오의 번역 그대로다. (이 시구와 「바람이 분다」라는 제목의 번역에 대해서 전에 쓴 글이 있다. 여기 참조 ⇒ 「바람이 분다-로 번역한 이유」)

……

슬프지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었다. 호리 다쓰오의 소설 『바람이 분다』의 감수성이 그대로 애니메이션이 된 것 같은, 애절한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은 「아리에티」와 닮았다. 하지만 「아리에티」보다 무겁고 슬프다. 주인공에게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에티는 배우고 성장해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 간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흔들림없는, 확고한 꿈을 품고 있다.

처음부터 지로(주인공 이름) 앞에는 길이 하나 놓여 있고, 한순간도 고민하는 일 없이 그 길을 계속 걷는다. “비행기 설계사가 되어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겠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는 지로의 모습은 존경스럽다. 하지만 어떤 길을 골라야 하는지, 혹은 자신이 고른 길은 옳은 길인지, 고민하고 고뇌하는 일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그려져 있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전투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역사란 인간이 선택해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처럼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역사를 숙명이라 했는데, 「바람이 분다」에서 역사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지로에게 있어 꿈이 그러한 것처럼. 따라서 역사의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지로가 걷는 길을 뒤덮는다. 그에게는 무겁디 무거운, 애달픈 기분을 짊어지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연애는 그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연애라는 테마는 절묘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연애에는 뭔가가 부족하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지로의 꿈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어둠과, 두 사람의 연애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이 공명하면서 잔잔한 아름다움이 내 깊은 곳에 생생한 감각으로 자리잡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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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의 배경 세계로 대부분 가상의 세계를 그려왔는데,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역사 의식과 같은 숫자의,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예를 들면 가난한 일본이 강대한 서구를 뒤쫓기 위해 소박하게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이 장면에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여기에 공감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자연스레 “가난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을 떠올리게 할테니까. 한국에서 상영되면 어떤 논의가 펼쳐질지 대체로 예상이 간다(우리에겐 “안봐도 비디오”라는 아름다운 고사성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다 봤지만 아직 재미가 남아 있다. 한국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질지 추측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논의를 기다리는 재미.

내 예상이 빗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맘 껏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것을 그린 것 같다(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전혀 아니다). 따라서 이 아름다움을 십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어렵게 하는 과거와 현재가 있다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지로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이 – 그 길이 향하는 곳, 또는 그 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아름다움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의 슬프고 아름다운 걸음걸이에 푹 빠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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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by Kim on 2016年11月4日 - 19:12

    정말 공감되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한편의 시라고 생각되는 영화라고 부르고싶네요..

    아쉽지만 한국에선 대부분 부정적인 인상으밖에 안남은듯합니다.
    (안보신 분이 대다수인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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