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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 SF, 판타지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 – 이나바 신이치로

근대 사회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조정해, 구성원이 하나의 ‘현실’을 상상적으로 공유케”(아즈마 히로키『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2007, 63쪽)했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말했던 거대 담론이라 봐도 무방하다. 근대의 리얼리즘은 ‘하나의 현실’을 공유하는 근대적인 ‘상상력의 환경’ 속에서 태동한 소설의 전형이었다. 이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의 형성과도 궤를 같이 한다.

리얼리즘 소설은 ‘하나의 현실’, 혹은 ‘상상의 공동체’ 형성과 전파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구성적 기능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형성된 ‘하나의 현실’에 의거한 소통 환경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를 보다 강화하는 ―루만의 용어를 빌리자면― 재귀적 기능 또한 수행하게 된다. 리얼리즘은 사회 구성원들이 믿고 있는 ‘하나의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참조하면서, 이 현실을 살고 있을 법한 가상의 존재가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소통 기제인 것이다. 만약 독자와 ‘동일한 현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무너지면 소설가는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허구 세계 자체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는 등장인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전달한다는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소통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다.

이나바 신이치로(稲葉振一郎)는 근대적 리얼리즘이 그리는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리얼리즘의 작품 세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현실 세계 그 자체는 아니지만, 발신자와 수신자가 실제로 살아 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이미지, 즉 ‘공통 인식 common knowledge’ 속에 자리하고 있다”(이나바 신이치로『근대의 쿨 다운』2006, 80쪽)

“리얼리즘 소설이나 영화가 ‘현실 세계’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이유는, 우선 효율의 문제 때문이다. 작가가 원하는 바가 주제의 전달이고, 독자가 향유하고 싶은 바가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러한 사건의 무대가 되는 세계의 구축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 단계에서 불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게 좋다.”(56쪽)

리얼리즘의 ‘현실 세계’는 소설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공통 인식’에 기대고 있으며, 위에서 말한 ‘상상의 공동체=국민 국가’ 또한 공통 인식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론적으로는 리얼리즘과 전혀 다른 목적을 지닌 소설도 있을 수 있다. 즉, ‘공통 인식에 의거한 현실 세계’와는 다른 ‘소설가가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가 지닌 매력과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소설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소설은 세계 설정 자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이나바는 판타지를 이러한 소설 장르로 지목하고, 한편 SF를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중간에 속하는 장르로 본다. 판타지는 현실 세계와 전혀 다른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설정하고 있는 반면, SF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머나먼 우주와 같이 현실 세계 중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의 교차점을 무대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은, 그러한 ‘현실’이 탄생하고 공유될 수 있는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소통 환경 자체의 변화가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발신자와 수신자의 의사소통을 둘러싼 조건이 변화했기 때문에 기존의 소통 방식과는 다른 소통 방식이 보다 효율적인 전달 형태로 대두된 것인데,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탄생한 리얼리즘이 바로 새로운 전달 방식의 소설적 형태였던 것이다.

※ 바로 앞 글과 마찬가지로 원고 쓰다 지면 관계 상 싣기를 포기한 부분을 여기에 올려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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