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성 : 공허를 주시하기

 

2002.2.21

환상성 : 공허를 주시하기 – 로즈메리 잭슨의 [환상성 – 전복의 문학]을 읽고

우리 말의 “환상”은 일차적으로 ‘현실이 아닌 것’을 뜻한다. 그 의미가 긍정적으로 쓰이든, 부정적으로 쓰이든 ‘환상’은 현실의 바깥에 있는 -상상력이 구성한- 허구세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이라는 단어가 문학과 연결되어 사용될 때, 우리는 쉽게 현실의 무미건조함을 보완해주는 화려하고 몽환적인 신화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는 개개인의 행복을 채워주는 가상공간의 구현. 환상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꿈의 세계이다.

로즈메리 잭슨도 ‘환상적인 것’이라는 표현을 ‘비현실적인 느낌’을 지칭하는 말로 쓴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느낌’이 심리적 안정을 보장해 줄 때, 그것을 ‘환상적인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현실’의 경험이 심리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한에서 그것을 ‘환상적인 것’이라 부른다. 앞서 말한 대체만족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는 ‘비현실적인 느낌’에 대해서는 ‘경이적인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둘은, 그것이 인간 주체에 미치는 효과는 비록 다를지언정 ‘비현실’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작용이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힘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현실 아닌 것에 대한 관심을 근절하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갈망한다. 욕망은 ‘비현실’의 공간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다. 로즈메리 잭슨은 이러한 현실너머를 향한 욕망의 운동을 ‘현재에 대한 불만’,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현실의 결핍이 욕망을 월경으로 치닫게 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 해소=비현실을 향한 욕망의 운동>은 두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현실을 파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온존히 유지한 채 욕망을 채워주는 가상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가 앞서 말한 ‘환상’과 ‘경이’의 차이를 말해준다. ‘경이적인 것’은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가상의 세계가 창출해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 세계의 구성원리는 현실의 문화가 주체에게 부여한 의미체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즉 현실이 강요하는 욕망구조를 이상적으로 구현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 ‘경이’라 할 수 있다. 경이문학의 서사세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몽환적인 것이지만, 그 서사구조는 기존의 문학과 대동소이하다. ‘경이문학’에 해당하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현실 그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형상화하지만, 그 세계의 질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엄격한 중세적 질서에 대한 향수에 그 기원을 둔 것이다. 경이로운 세계의 지배적 가치관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의 가치관보다도 더욱 도덕적이고 지배질서에 충실하다.

한편 ‘환상’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현실을 향한 의혹갖기’로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 [지킬박사와 하이드] 그리고 [드라큘라] 등으로 대표되는 환상문학은, 현실에 속해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방향타인 “이성과 리얼리티가 자의적이며 전환가능한 구성물(p33)”임을 보여준다. 의식되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작용하면서 주체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던 일상적인 의미구조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환상’은 현실의 의미체계를 대상화하고 상대화한다. 그리고 그것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비현실적 영역의 존재 – ‘타자’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환상’은 인간으로하여금 인간의 시각 자체를 지배하던 인식틀의 경계에 서게 한다. 인간은 그러한 위치전환을 통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금지된 영역에 진입한다. 그곳에서 이성은 갈곳을 잃고, 억압된 욕망은 무질서를 실현시킨다. 그곳에서 존재는 우연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을 지니지 못하며, 앞으로도 그 어떠한 안정성도 얻지 못할 것이 확실한 섬뜩한 경험이 된다. 존재는 부재로 대체되고, 세계는 공허한 무질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환상’은 현실의 가치체계가 존재에 제공하는 ‘안정’을 끊임없이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질서의 구축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이러한 환상의 특성은 지금까지 환상문학을 지배적 구조의 주변부에서 겉돌게 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이러한 환상문학은 새로운 평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로즈메리 잭슨의 작업도 이러한 새로운 평가 작업에 속한다 할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환상문학’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것은 혹시 환상문학의 전복적 역량의 소멸(적어도 약화)이 아닐까? 환상문학이 현실을 교란하고, 전복의 가능성으로 여겨졌던 것은 현실의 가치체계가 견고한 질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대사회의 지배질서가 더 이상 견고하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지배질서 마저도 혼란의 영역에 속하고 말았다면 과연 ‘환상문학’은 전복을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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